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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

7세 고시도 너무 늦다며 '4세 고시'라는 말도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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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고시 시대, 그 아이는 오늘도 웃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몇 살에 시작했는가’를 인생 성적표처럼 매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7세 고시’가 빠르다 했고, 지금은 ‘4세 고시’가 대세란다. 걸음마를 갓 뗀 아이에게 "넌 어떤 대학을 갈 거니?" 묻는 세상. 아이는 눈도 못 맞춘 채 엄마 손에 이끌려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한글보다 알파벳을 먼저 배운다. "집중해, 이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그 말 속엔 엄마의 불안이 숨겨져 있다. 비교하고, 조급해하고, 놓치지 않기 위해 앞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 아이는 아직 철봉도 못 잡지만, 인생의 철봉 위에서 이미 중심을 잡고 버텨야만 한다.

아직 크레파스 색 구분도 못 하는 아이가 논술 수업을 듣고, 잠자는 시간보다 학원 스케줄이 더 빼곡한 아이들이 있다. 책상에 앉아 집중하는 훈련이 아니라,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 위해 자기 마음을 숨기고, 울음도 참아야 하는 삶.
그 삶은 ‘성장’이 아니라 ‘조련’에 가깝다.

사교육 시장은 마치 시간보다 앞서 달리는 시계처럼 끊임없이 더 빠른 준비를 외친다. “요즘은 다들 5세 전에 코딩 시작해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어학 자격증 하나쯤 있어야 해요.” “요즘 애들은 유아 심층면접도 준비해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매일 일과표를 따라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웃음을 잃고, 질문을 멈춘다. "왜?"라는 말 대신 "그건 시험에 안 나와"라는 대답을 먼저 배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미래'를 주기 위해 오늘을 빼앗는다. 사회는 그 조급함을 부추기며 불안을 팔고, 기업은 그 틈에서 이익을 남긴다.
‘4세 고시’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누가 정했는지 모를 기준에 맞춰 ‘이 시기를 놓치면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협박을 아이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들이민다. 하지만 정작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아이는 행복한지.

밤 9시, 불 꺼진 학원 창밖으로 아이가 혼잣말을 한다. "엄마, 나 오늘 100점 못 받았어." 그 작은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자책은, 어린 마음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다.


“넌 아직 4살이야.”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속도를 멈춰주고, 그 아이의 시간을 지켜주는 그런 어른.

우리는 언제부터 ‘놀 줄 아는 아이’를 ‘게으른 아이’라 오해했을까. 친구와 모래 놀이하며 쌓은 성은 허물어졌지만, 그 아이 마음 속엔 작은 꿈이 쌓인다. 수를 잘 세는 아이보다, 이야기를 잘 들려주는 아이가 더 창의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시험 문제로는 측정되지 않는다.

"4세 고시."
그 말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말해주는 거울이다. 지나친 조기교육, 비교의 덫, 사라진 아이의 시간들.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앞서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속도대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 아닐까.

지금도 누군가는 타이머를 들고 아이의 시간을 쪼개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세상이 과연 옳은가?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아이는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존엄한 인간이며, ‘어른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도구’가 아니라고.

가장 빠른 시작이 가장 행복한 끝을 보장하진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조기 교육이 아니라,
조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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